The Origin Point (0,0,0)

과거가 된 풍경

디자인 산업은 늘 기술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전환점에 직면하게 됩니다. 마치 3D 모델링 프로그램의 구성평면에서 원점을 다시 찍고 축을 재정렬하듯, 시대는 디자이너에게 또 다른 출발점을 요구해 왔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하기 직전, 그 시절의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PMP, 전자사전, 다양한 형태의 휴대폰, 포켓 사이즈 디지털 카메라 같은 제품들이 활발히 디자인되고 있었습니다. 벽면에는 무수히 많은 휴대폰 버튼과 소형 QWERTY 키보드 디자인 시안이 빼곡히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전자사전의 경첩을 더 세련되게 만들기 위한 고민과 작은 키보드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려는 스케치들이 흩어져 있던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사진_아이리버 전자사전 D100, 2010

그러나 아이폰이 등장하며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사고 체계에 자리 잡고 있던 원점 좌표는 빠르게 이동했고, 그 많던 물건들이 순식간에 통합되고 사라졌습니다. 정전식 터치스크린과 새로운 UI는 버튼이 사라진 제품을 만들어냈고, 디자이너들은 갑자기 수많은 키패드와 힌지가 사라진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지, 비워진 표면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터치스크린 혁명은 디자인 미학과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었고, 제품의 조형은 복잡함에서 간결함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진_애플 아이폰, 2007

이후 제품은 단순히 통합을 넘어 서비스와 결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이라는 하드웨어 안에서 앱,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가 사용자 경험의 중심이 되었고, 디자이너들은 점점 물리적 제품을 넘어 앱과 디지털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과거 ‘제품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을 의미했다면, 어느새 ‘프로덕트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UI·UX, 서비스 디자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손으로 스케치하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만들던 ‘제품 디자이너’이기에, ‘제품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UI·UX, 서비스 디자인을 의미하는 ‘프로덕트 디자인’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적잖이 낯설기도 합니다.

모방과 창조의 경계

그러나 물건을 만드는 디자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조업의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아시아 디자인 산업은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1 오랫동안 아시아 디자인은 서구의 독창성(Originality)을 따르는 ‘레퍼런스의 소비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제 아시아 디자이너들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새로운 창의성의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 고민은 AI 시대가 던지는 ‘독창성’에 대한 질문과 깊이 연결됩니다. AI가 손쉽게 결과물을 제안하는 시대에 디자이너의 독창성이란 무엇일까요?

본래 모조품을 뜻하던 중국의 ‘산짜이(Shanzhai, 山寨)’ 개념은 철학자 한병철의 재해석을 통해, 단순 복제를 넘어선 동아시아 고유의 창조적 과정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2 그는 저서 『Shanzhai: Deconstruction in Chinese』에서 서구 사상이 불변하는 ‘존재’와 유일무이한 ‘창조’를 중시하는 반면, 중국 사상은 고정된 시작이나 끝이 없는 ‘과정(process)’과 ‘변화(change)’ 자체를 핵심으로 본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산짜이는 원본을 파괴하는 위조가 아니라, 원본을 끊임없이 변형하고 가지고 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탈창조(decreation)’ 의 과정입니다.

사진_Mifone사에 제작하여 케냐에서 판매된MI-205F Obama Phone

한병철이 제시하는 일본의 이세 신궁(伊勢神宮) 사례는 이러한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신궁은 20년마다 완전히 똑같이 새로 지어집니다. 여기서 정체성은 고정된 원본 건물이 아니라, ‘지속적인 재생산’이라는 과정 자체에 있습니다. 복제품이 곧 원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원본의 보존과 복원에 집착하는 서구적 시각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진_이세신궁의 시키넨센구(式年遷宮) / 출처 isejingu.or.jp
사진_ 이세 신궁의 ‘식년천궁’(式年遷宮)은 20년마다 신궁을 동쪽과 서쪽 부지에 번갈아 새로 짓는 일본 전통 의식 / 출처 isejingu.or.jp

그렇다면 산짜이의 유동적인 생성 과정이 AI를 통한 무분별한 복제와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최근 유행했던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처럼, 특정 스타일을 AI로 복제하며 즐기는 현상은 산짜이의 ‘놀이(play)’ 개념과 닮아 보입니다. 사용자들이 특정 스타일을 참조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고 공유하는 행위는 분명 창조적 놀이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진_OPEN AI의 GPT 모델로 생성된 지브리풍의 이미지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창조적 놀이와, 사회적 책임과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전문적 행위로서의 ‘디자인’은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짜이의 창조성은 원본을 변형하고 조합하는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에 기반합니다. 기존 로고를 익살스럽게 비틀거나 예상치 못한 기능을 결합하는 등, 원본과의 관계를 인지하고 그 차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듭니다.

반면, 현재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사용자의 ‘놀이’라는 의도와 별개로, 그 과정의 투명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AI는 출처와 맥락이 제거된 방대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재조합할 뿐, 그 과정에서 원본 창작자(예: 스튜디오 지브리)의 기여와 노력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쉽게 사라집니다. 사용자의 의도는 즐거운 놀이일지라도, 그 도구의 작동 방식이 원본의 가치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특히 디자인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문제 해결, 맥락 이해, 윤리적 책임이 수반되는 전문 분야입니다. 창작의 과정이 불투명하고 원작자의 기여가 삭제된 도구를 전문 디자이너가 무비판적으로 사용할 때, 창조적 놀이는 윤리적 껍데기가 벗겨진 표절로 전락할 위험을 안게 됩니다.

물론, 현실의 산짜이 현상 역시 현대의 지식 재산권 체계와 충돌하며 법적·윤리적 논쟁을 안고 있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한병철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모방과 창조의 이분법을 넘어, ‘과정’과 ‘변형’으로서의 창조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AI 시대에 진정한 독창성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산짜이는 단순한 복제품 이상의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기술의 전환점

디자이너는 지금 AI라는 또 다른 기술 전환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축이 다시 회전하는 듯, 우리는 또 다른 원점 앞에 서 있습니다. CAD가 도입되던 1980년대에도 디자이너들은 비슷한 갈림길에 섰습니다. 셰리 터클은 당시 디지털 도구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던 학생들과 이를 경계하던 교수진의 상반된 태도를 관찰했습니다.3 일부 건축가, 엔지니어, 과학자들은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과 아날로그적 사고가 사라질까 우려했고, 다른 이들은 컴퓨터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에 집중했습니다. AI를 둘러싼 지금의 분위기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CAD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도 기성 디자이너, 교육자, 엔지니어들은 기존의 일자리와 작업 방식을 잃을 것을 우려했습니다. 지금 AI 역시 디자이너들에게 익숙한 역할과 가치가 위협받는 듯한 감각을 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빠르게 고품질의 디자인을 생성할 수 있는 환경이 열렸고, 일부 디자인 스튜디오는 AI 사용 사실을 포트폴리오에 과감히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AI는 강력한 도구일 뿐, 그 결과물 자체를 창작의 최종 산출물로 내세우는 것은 디자이너가 더욱 신중해야 할 지점입니다. AI는 ‘과정’을 돕는 도구이지, ‘결과’에 대한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한병철의 통찰처럼 서구가 신성시해 온 ‘원본의 아우라’가 기술적으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창작의 윤리적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병철이 설명한 산짜이는 원본을 의식하고 그것을 비트는 의도적인 ‘놀이’이자, 수많은 감상자와 모방가들의 흔적(跡)이 겹겹이 쌓이는 ‘탈창조’의 과정입니다. 반면 AI가 생성한 결과물은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흔적이 소거된 채 나타납니다. 여기서 문제는 ‘오리지널리티의 부재’가 아니라, 창조적 변형을 이끄는 ‘과정의 부재’이자 ‘흔적의 소멸’ 입니다. 이처럼 과정과 흔적이 사라진 곳에는 창작의 책임을 물을 주체 또한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기술이 일부 역량을 대신하게 되면서, 디자이너는 오히려 본질, 사회적 맥락, 디테일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CAD에서 AI로 이어지는 도구의 발전으로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여력을 얻게 되었고, 이 여력은 이제 기후변화, 공급망, 다양성, 접근성 등 더 넓은 사회적 책임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창조의 마지막 책임자

AI 시대의 디자이너는 단순히 의도한 프롬프트를 AI에게 전달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AI는 요청을 그대로 수행하지만, 그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끝까지 디자이너의 몫으로 남습니다. 생성된 결과물이 어떤 데이터에 기반했는지, 표절이나 편향의 위험은 없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는 필수입니다. 이는 타인의 창작물을 무의식적으로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생성형 AI는 개인의 창의성을 확장하는 유용한 도구지만, 모두가 비슷한 디자인을 반복하게 만드는 위험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AI의 제안에 안주하지 않고, 결과를 참고안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의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태도는 디자이너가 반드시 지켜야 할 자세입니다. 마지막 판단과 책임은 언제나 사람에게 남아 있으며, 디자이너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철학으로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다듬는 최종 책임자입니다. 제품이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고, 사용자와 어떤 윤리적 상호작용을 유발할지까지 설계 단계부터 고민하는 통합적 사고 역시 디자이너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국면,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의 원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디자이너들은 전통적인 생산기반, 빠르게 성장하는 기술 환경, 그리고 지역 고유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AI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 지역에서 새로운 창의성과 윤리적 기준을 제안할 차례입니다. 아시아 디자이너의 고민과 선택이 이 변화의 중요한 방향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다음 포인트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새로운 좌표는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할까요? 창조의 원점은 고정된 지점이 아닙니다. 디자이너는 기술이 제시하는 결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매 순간 구성평면 위에서 스스로의 기준을 다시 설정해야 합니다.


  1. WIPO 세계 지식재산 지표 (World Intellectual Property Indicators 2024)에 따르면 아시아 디자인 산업의 위상 강화를 보여주는 지표로서, 2023년 전 세계 산업디자인 출원 건수의 약 69%가 아시아에서 나왔다. 이는 유럽(23.5%)이나 북미(4.5%)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로, 중국과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글로벌 디자인 활동을 주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2. Byung-Chul Han, “Shanzhai: Deconstruction in Chinese,” MIT Press, 2017. ↩︎
  3. Sherry Turkle, “Simulation and Its Discontents,” MIT Press,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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